아주 예전에는 종인이 생활했고 그 이후에는 디오가 지냈을, 제이의 거처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숙소는 먼지가 조금 쌓인 것을 제외하면 깔끔했다. 더러워지지 않도록 천을 씌워놓은 가구들 너머의 벽면에는 종인이 조사하고 디오가 추가로 알아낸, 교단에 대한 정보들이 가득 붙어있었다. 말로는 아무렇지 않게 교단을 친다고 했었지만 그날을 위해 디오가 얼마나 오...
“다 왔어, 이쪽이야.” 한참 운하를 돌던 곤돌라가 어느 다리 밑에서 멈췄다. 백현은 먼저 땅에 내려서서 디오의 손을 잡고 위로 끌어올렸다. 텅 비어있던 거리에 옷자락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구두 소리가 울렸다. 성냥갑처럼 작은 건물들이 양쪽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을 조금 걷던 백현이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짤깍거렸다. “어디 보자, 이 근처였던 것 같...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열차가 출발하기까지는 여유가 제법 있었다. 티켓을 끊은 두 사람은 역 안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주문하고 테이블에 마주앉아 시간이 가기를 기다렸다. 자리를 잡기 위해 주문을 하긴 했으나 딱히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었던지라 조용히 자리에 앉아있는 동안 카페 직원이 서비스라며 디오에게 쿠키를 갖다주었고, 디오는 이제 익숙한 듯 웃으며 감사...
디오는 단 한 번도 생(生)을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머니의 태(胎)를 비집고 태어나 차가운 공기를 폐 속에 가득 채우고 세상에 날카로운 첫 울음을 토해내던 순간부터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어려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조금 커서는 오로지 교단의 이익과 만족을 위해, 교단을 벗어나고부터는 복수에 대한 열망 하나로 죽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버...
제이가 교단에서 아스모데우스를 되찾아오기까지는 무려 일주일의 시간이 걸렸다. 안에 있는 노블레스와 고위사제들을 전부 들쑤셔 자신을 쫓게 만든 다음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아스모데우스를 훔쳐 달아나는 일이란 게 그리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루 만에 교단을 탈출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추적을 따돌리기가 쉽지 않아 엿새 동안 온갖 고생을 다 한 끝에 후줄근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한 줌 재로 만들었는데도 검은 옷자락은 여전히 어지러운 잔상이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백현은 들이마신 잿가루 때문에 구역감을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루시퍼의 빛을 가졌다고는 하나 상대는 노블레스였고 무엇보다도 숫자가 지나치게 많았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바티칸이 본거지라고는 하지만 교단의 영향력은 전 세계에 미치지 ...
백현은 천천히 창가에서 물러났다. 창문 너머로 느껴지는 살기에 숨이 턱 막히고 살갗이 따끔거렸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자신의 목을 따려 몰려와서 기회만 노리고 있는 상황은 아무리 배짱 좋은 백현이라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이 잔뜩 화가 나서 달려온 노블레스들이라면 더더욱. “뭐, 교단을 박살냈으니 복수하러 올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뺨을 타고 올라오는 냉기에 눈을 떴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낯설면서도 익숙한 것들이 들어왔다. 어둡고 차가운 돌벽, 천장을 향해 곧게 세워진 열세 개의 기둥, 발목에 채워진 족쇄, 제단 아래에 서있는 사제들. 그제야 디오는 기억해냈다. 재단사의 화형식이 있기 훨씬 이전, 자신이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는 사실...
눈동자 위에 성흔이 떠오른 뒤로 디오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가진 것이라고는 헌 목도리와 장갑, 상처 치유 능력밖에 없던 어린애는 한순간에 교단의 가장 높은 존재가 되었다. 신이 깃들었다는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사제들은 축복의 말을 건넸고, 그가 지나는 걸음마다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
가까스로 교단을 탈출한 아스모데우스가 그들을 데려간 곳은 디오의 은신처였다. 발이 땅에 닿자마자 문짝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간 백현은 루시퍼의 빛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곧이어 그 뒤를 따라온 찬열이 디오를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히고 자신 역시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지칠 대로 지친 숨을 고르기를 몇 차례, 먼저 입을 연 것은 백...
자신들이 뚫고 들어온 자리를 뒤돌아본 백현이 박 터지는 소리를 냈다. 천장과 벽이 맞닿는 모서리에 뚫린 구멍이 저절로 복구되고 있었다. 처음 미로가 열릴 때처럼 크고 작은 돌이 서로 맞물려 깔끔하게 정리되는 모습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백현에 이어 자리에서 일어난 찬열이 옷을 탁탁 털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블레스 소속으로 한때 교단에서 지냈던 그에겐 이...
디오가 스티그마로 각성을 한 것은 여섯 살 때였다. 그 전까지의 그는 이렇다 할 것 없는 평범한 어린아이였다. 광신도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신물이 나서 모습을 감춰버린 아버지, 빈약한 생계수단, 여름이면 쥐가 돌아다니고 겨울에는 바람에 삐걱대는 집에서 하루하루 모진 생을 이어가던 것만 제외한다면. 언제나 그랬듯 여섯 살의 디오는 배가 고파 혼자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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