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와 있던 가마는 늦은 밤이 되도록 집 앞을 지키고 섰다. 벌써 엿새째 이어지는 무언의 압박에 애꿎은 집안사람들만 눈칫밥을 먹고 살았다. 높지도 않은 담 너머로 툭 튀어나온 사람들의 머리에 씌워진 갓은 꼭 저승사자의 그것 같아, 나는 너의 등에 붙어서 답지 않게 칭얼거렸다. “가기 싫어.” 그저 투정일 뿐인 나의 말에 너는 어깨를 움츠렸다. 나보다 ...
금방 지나갈 거라던 비는 벌써 사흘째 계속되고 있었다. 내리긋는 빗줄기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흐릿해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다. 근처의 컨테이너박스를 엄폐물삼아 몸을 숨긴 백현은 머리의 물기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이봐, B. 아직 살아있어?」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찬열의 목소리에 백현은 대답 대신 무전기를 두어 번 툭툭 쳤다. 그 작은 소...
백현은 지금 일생일대의 기로에 서있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고용주는 백현이 쓴 편지를 벌써 세 번째 정독하는 중이다. 꼴랑 한 장짜리 연애편지-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일방적인 고백편지-에 뭐 볼 게 있다고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상황이 매우 피마르는 것은 분명하다. 작업할 때가 아니면 쓰지도 않는 안경까지 쓰고 미간에 주름을 잔뜩 잡은 채 편지를 ...
그 날은 백현의 열일곱 번째 생일이었다. * 낮 동안 화창했던 것과는 다르게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 백현은 선실에 앉아서 멍하니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다의 날씨란 원래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할 정도로 변덕스러운 법이라, 이미 크루즈 안의 사람들은 밖에 나가지 않고도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나름의 방법들을 찾아낸 상태였다. 각종 게임과 판돈...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새벽의 침실은 무채색의 톤을 하고 있었다. 경수는 침대에 누운 채 시트가 만들어낸 자잘한 주름을 가만히 눈으로 세어보았다. 알람이 울리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은 온전히 경수의 차지였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어수선한 귓가에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혼자 일어나는 아침을 맞이하게 된 이후로 처...
표면적으로 두 사람 사이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지만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었다. 첫째는 경수가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백현이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원하는 부분의 진도는 다 뺐으니 더는 학원을 다닐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원래 말발이 좋은 건지 그동안 들어둔 보험이 제 몫을 톡톡히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백현의 의견...
경수는 담배를 끊었다. 담배를 넣어놓던 자리엔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달콤한 간식이 들어갔다. 수업을 빼먹고 올라가던 옥상도 더는 가지 않았다. 옥상을 홀로 점령했던 경수가 빠지자 그곳은 다른 학생들이 모여 몰래 담배를 피우는 장소로 변모했다. 경수는 이제 지각을 하지 않았다. 일찍 와서 한 시간도 빼먹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다보니 수업을 듣는 시간도 자연스럽...
닳고 닳아 경계가 불분명한 계단을 한참 올라가면 성냥갑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녹이 슨 양철 대문이 바람에 삐걱대는 소리를 낸다.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비탈진 골목을 사이에 두고 늘어서서 내 집 들어가는 구멍과 남의 집 들어가는 구멍이 분간되지 않는 달동네에선 이런 대문의 존재 자체가 흔치 않은 편이었다. 드문드문 파란 칠이 남아있는 대문의 앞에는...
멀지 않은 곳에서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화약 섞인 매캐한 연기를 급하게 들이마실 때마다 폐가 아릿했다. 사이즈가 맞지 않아 눈 아래로 흘러내리는 철모를 뒤로 젖히며 백현은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바야흐로 지긋지긋한 전쟁의 끝물이었다. 기세 좋게 남하하던 적군은 막바지에 참전한 연합군의 깃발 아래 꽁지가 빠지게 후퇴하고 있었다. 물론 최후의 발악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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