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경수가 울었다. 오늘은 꼭 짝사랑하던 여자애에게 제 마음을 고백할 거라고 하더니 잘 안된 모양이었다. 걔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대. 분명 나 같은 애보다 훨씬 멋있고 괜찮은 사람이겠지? 핫초코가 가득 든 머그를 앞에 놓고 훌쩍거리는 모습은 구질구질하기 짝이 없었으나, 백현의 눈에는 그마저도 귀여워 보여서 환장할 노릇이었다. 너보다 멋있고 괜찮은 사람은...
베네치아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열고 가장 늦게까지 불을 켜놓는 것으로 유명한 엘의 가게는 오늘도 아침부터 분주했다. 새벽에 들어오는 식재료들의 상태를 보고 바로 요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손질을 마친 뒤 남아있는 향신료의 양을 꼼꼼히 확인한다. 며칠 전에 넉넉히 사다둔 로즈마리와 바질은 충분했지만 월계수잎과 후추는 간당간당했다. 엘은 주문목록에 두 가지 향신료...
찬열은 헌터 생활을 청산했다. 백현과의 서열 싸움에서 패한 게 은퇴의 원인일 것이라는 소문은 곧 자연스럽게 퍼졌다. 그들이 승패를 가리는 것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긴 했으나, 한쪽이 은퇴한 것을 보면 나머지 한쪽이 이긴 게 아니냐는 것이 헌터 사회의 중론이었다. 본의 아니게 서열 1위가 된 백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엘의 가게에 들러 베팅 물품 중 하나였던...
스튜에 이어 꿀물까지 해치운 세 사람은 가게를 빠져나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이른 아침이라고는 하나 출근시간을 훌쩍 넘긴 거리는 한산한 편이었다. 입고 있는 코트의 깃을 세우고 목과 어깨를 잔뜩 움츠린 틈새로 3월 초의 시린 기운이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겠으나 간밤의 과음으로 약해진 몸은 너무나도 쉽게 고통을 호소했다. “으에취!”...
아직 이른 저녁임에도 피렌체 외곽의 술집은 발 디딜 틈 없이 꽉 찼다. 가볍게 한잔 하러 온 사람들부터 오랜만에 회포를 풀러 온 사람들까지 바글바글 몰려와 떠드는 통에 넓지도 않은 술집 안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크고 작은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 테이블 위에 포커판을 펼치고 서로의 패를 확인하려 은근슬쩍 눈치를 보는 자들, 한쪽 벽면에 설치된 다트판에 ...
그 난리를 피우고 나왔는데도 교단에서는 찬열을 쫓지 않았다. 미카엘의 문장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하니 한 사람도 안 찾아올 줄은 몰랐다. 잔뜩 각오했던 것치고는 참으로 시시한 결말에 찬열은 자신의 오른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만일 내가 미카엘을 봉인했다는 걸 그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고민할 가치조차도 없는 질문의 답은 ...
사람의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어서, 찬열은 숙취로 고통 받는 와중에도 늘 일어나던 그 시간에 잠에서 깼다. 눈을 채 뜨기도 전에 몰려오는 두통에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두개골을 망치로 쾅쾅 두드리는 기분이었다. 눈알이 빠질 것 같은 고통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찬열은 생각했다. 내가 또 술을 마시면 개다 개. 그리고 서품식과 ...
교단의 12사도. 예수의 열두 제자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그들의 이름을 물려받으며, 교리에 따라 스티그마를 보좌하고 노블레스 위에 군림하는 순혈(純血)주의자들. 이들은 높은 권위와 명예에 걸맞게 그 후보생 역시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결정된다. 출신성분과 생활태도, 개인의 고유능력은 물론이고 기존 12사도와 고위사제들이 직접 나서서 실시하는 사상검증을...
밖에 나가서 상자를 불태운 디오는 그러나 모든 것이 다 타고 재만 남은 뒤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밤새도록 밖에 서서 바람에 날리는 재만 내려다보는 디오 때문에 백현 역시 한숨도 자지 않고 창가에 앉아서 그런 디오를 지켰다. 언제든 디오가 들어와서 쉴 수 있도록 피워놓은 벽난로의 불을 지핀 백현이 낮에 주웠던 종이를 이리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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